딸아이가 출국을 하기 위해 오전에 기차를 타고 갔다. 밤 8시 55분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인데, 오후 5시 30분에 인천공항에 집결하라는 공지가 떴다. 그 시간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는 11시쯤 KTX를 타야 한다. 긴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또 공항열차를 갈아타는 과정이 꽤 번거롭다.
기차가 진입하는 안내 방송이 울릴 때 딸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딸은 "아빠도 엄마랑 잘 지내세요."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기차에 올랐다. 대견하면서도 내내 서울을 오가야 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짠했다.
딸아이가 탄 기차가 멀리 사라지는 걸 지켜보는데, 문뜩 지방살이의 서글픔이 느껴지면서 가슴 한켠에 이슬방울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지며 지축을 흔드는 것 같았다.
엊그제 딸아이와 저녁을 먹을 때였다. "아빠, 밥 먹고 나서 ㄸㅗㅇ 쌀 거다. 사실은 어제부터 마려웠는데, 작게 나올 것 같아 저축해 놨어." 이러는 거였다. 저녁을 다 먹고는 또 "아빠 나 ㄸㅗㅇ 드어어 쌌어." 하고는 까르륵거렸다. 이런 말을 할 때 보면, 딸아이는 영락없는 초딩이다.
딸아이는 언제쯤 저런 말을 안 하게 될까? 궁금해하면서도 세상물정을 다 알아버린 듯해서 한편으로 짠했다. 서울에서 연수 생활을 마치고 온 딸은 최근 부쩍 학벌 얘기를 많이 했고, 지금이라도 편입을 시도해 봐야 하지 않을까, 툭하면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삼십 대였을 때, 서울행을 결심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포기한 이후로 큰 불편 없이 지금까지 그럭저럭 살았던 것 같다.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이 커서 이러저런 경시대회를 나가려면 창원에서는 치러지지 않아 부산이나 서울로 가야했지만, 그저 작은 불편쯤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아들딸이 취업할 시기가 다가오니 생각이 많이 바뀌는 것 같다. 딸아이는 해외 컨퍼런스에 갔다 귀국하면 미리 구해놓은 오피스텔로 곧장 가서 다시 서울살이를 한다. 딸은 "이번에 서울 가면 한두 달에 한 번은 집에 와야겠어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보니 그랬다. 아들딸 모두 이구동성으로 "아빠, 집에 왔다. 집에 오니까 좋네."라고 했던 말이 그냥 했던 말이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실감했다. 서울서 오려면 기차표값만도 십만 원이 넘어가니 선뜻 올 수 없었던 그 마음을 지금껏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이삼십 대의 누군가 조언을 구한다면 이제는 무리를 해서라도 서울로 꼭 가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보니 그렇더라고, 학교도 문화공간도 일자리도 거의 모든 것이 지방에는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데이터사이언스를 전공하는 아들도 서울이 복잡해서 싫다고 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들의 진심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터 직군으로 일하려면 서울 말고는 일자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더는 번잡한 타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는 발로였다는 것을. 아들딸이 원하는 학교가 없어 고향을 멀리 떠나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조선의 최고 지성이라는 정약용이 유배시절,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양에서 백리를 절대 벗어나 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까닭을 뒤늦게나마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그저 단순하게 아니 실학자라는 양반이 이 무슨 궤변인가 했었다.
딸아이가 뜨개질을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딸아이가 뜨개질한 수세미며, 모자, 가방들을 톡으로 보내올 때마다 서울살이의 고달픔을 뜨개질로 많이 달랬구나 생각했다.
젊은이들은 오래전부터 일자리를 찾아 하나둘 서울로 떠나갔고, 우리나라 거의 대부분의 지방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소멸될 것이라는 암울한 이야기가 나온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지방에 이렇게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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