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나태주와 풀꽃
시인 나태주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지혜, 2015)에는 그의 대표 시 풀꽃이 수록되어 있다. 시 풀꽃은 김소월의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만큼이나 널리 회자되었다. 풀꽃·1 전문은 단 3행에 24글자이다. 1행이 9자, 2행이 10자, 3행이 5자이다.
풀꽃·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토록 짧은 시가 어떻게 전국민적인 큰 울림을 낳았을까?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한중일을 비롯해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는데, 일본어판 저자 서문을 보면 그 단초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은 열여섯 살 때부터 시를 썼지만, 오랜 세월 시인으로서 무명의 세월을 보냈는데, 나이 칠십이 되어서야 블로그나 카페에서 풀꽃이 회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시인은 이렇게 짐작한다.
청소년 드라마 <학교 2013>에서 이종석이 시 풀꽃을 낭송하고, 그 뒤 블랙핑크의 지수의 공항패션에서 이 시집이 포착되었다. 방탄소년단 BTS의 RM이 이 시를 좋아한다는 기사가 떴고, 드라마 <남자친구>(tvN, 2018)에서 송혜교와 박보검이 이 시집을 들고 여러 차례 출연한 이후, 2019년 1월 한 달에만 꽃을 보듯 너를 본다가 10만 부 넘게 팔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음, 흔히 작품은 작가가 낳은 자식이라고 한다. 그러니 한 편의 시는 시인이 낳은 진또배기 자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 자식에 대해 부모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나는 시 풀꽃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시 풀꽃 패러디
시 풀꽃이 워낙 함축적이고 간결한 탓에 네티즌들이 패러디하기에 안성맞춤이 아니었을까? 이미 오래전부터 네티즌들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버전의 풀꽃 패러디가 하나둘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풀꽃의 티핑 포인트였다. 대표적으로는 아래와 같은 시(?)들이다.
스치듯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면 큰일 난다. 나만 그렇다.
흠칫 보아야 예쁘다. 대충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만 그렇다.
멀리서 보아야 예쁘다. 잠깐 보아야 사랑스럽다. 내 남편만 그렇다.
자세히 봤더니 어려웠다. 오래 봤더니 더 어려웠다. 중2 수학문제가 그렇다.
풀꽃 패러디 시를 보면 해학이 넘친다. 멀리서 보아야 예쁘다, 잠깐 보아야 사랑스럽다, 내 남편만 그렇다. 나는 지금도 이 패러디는 내 와이프가 쓴 시가 아닐까 의심해 본다. ㅋ
스치듯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면 큰일 난다, 너만 그렇다. 요 패러디는 어째 내 마음을 닮은 것 같다. ㅠ
시인 나태주의 시에는 서민의 애환과 절묘하게 와닿는 감성이 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장미나 수선화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름 없는 풀꽃도 예뻐해야 한다는 것이 시인의 마음이다. 어, 나는 풀꽃이 예쁘지 않은데요? 하는 사람에게 그럼 자세히 보라고 말한다.
시인은 풀꽃도 오래 보면 사랑스러운 데가 있다고 말한다. 어쩌겠나?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인데, 이게 시적인 경지다. 풀꽃을 사랑하는 마음, 그게 인생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주변인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도 실린 나태주의 시 사랑에 답하다를 음미하곤 한다. 그래야 속이 편하고 또 나를 가만히 돌아보게 된다.
사랑에 답하다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나태주의 사랑에 답하다는 시만큼 쉬운 시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을까? 쉬운데 잘 쓰지 못하고, 쉬운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시가 된다.
젊었을 때는 나태주의 시를 그저 언어유희, 말장난 같은 시라고 생각했다. 연예인들이 띄워 준 시라고도 치부했다. 그런데, 살만큼 살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상은 어려운 게 아닌 것 같은데도 어렵다. 세상은 참 쉬운 것 같은데도 쉬운 게 아니었다. 시도 그렇다.
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 인터넷의 블로그나 트위터에 자주 오르내리는 시들만 모은 시집이다. 시인 자신이 정한 대표작이 아니라 독자들이 뽑은 대표 시인 셈이다. 안개 자욱한 아침, 이슬을 머금은 풀꽃 같은 시들이 많이 실렸다.
좋다
좋아요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
묘비명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에 실린 가장 짧은 시들이다.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그런데,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는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자니 슬픔이 터져온다. 아직 그런 인생인 것 같다.
나태주 시인 프로필
1945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했다. 1963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43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46여 권의 시집과 시선집, 산문집, 동화집 등 다수의 책들을 출간했다. 2003년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시 풀꽃을 발표했다.
내가 뽑은 나태주 대표 시
풀꽃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풀꽃 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봐
참 좋아
행복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 있다는 것
마음이 외롭고 힘들 때,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권한다. 꽃을 보듯 너를 보는 마음이 생기면 매일매일이 조금 나아진다. 김용택의 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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