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희의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니>(현대지성, 2022)는 작가 정여울의 말처럼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우울증을 치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빨리 낫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격려하곤 한다. 인생은 생각하기에 달렸으니까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힘내라고, 의지만 있으면 그깟 우울증 따위는 아무것도 아냐라고 말이다.
이 책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니>의 저자 고태희는 인하대학교 공대를 수석 입학해서 차석 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재료공학부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포스코 기술연구원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고태희가 포스코를 벗어나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면서 그녀의 인생에서 장밋빛 미래는 사라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가 그녀의 일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포스코라는 대기업의 울타리 안에서 안락함과 무료함으로 허우적대던 서른아홉 살 고태희 앞에 스타트업 대표가 키다리 아저씨처럼 나타나 높은 직급과 연봉을 제안했다.
고태희는 4차 산업이 주도할 시장에서 하루빨리 그와 손을 잡고 새로운 분야에서 힘차게 뛰며 기업을 키워나가는 꿈에 부풀어 이직이라는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스타트업에 이직 후, 가랑비에 옷 젖듯 그녀의 나날에 우울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 스타트업 대표는 "가슴도 엉덩이도 전혀 볼 것도 없는 주제에", 라든가 "완전 아줌마야, 아줌마",라는 여성비하 발언을 일삼았다. 고태희는 가스라이팅으로 공황장애가 일어났고 이직 6개월 만에 생애 처음으로 휴직계를 내자 대표는 그녀에게 퇴사를 종용했고 그녀는 그가 바라던 대로 사직서를 냈다.
고태희는 복통으로 찾은 내과에서 우울증 판정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된다.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고태희. 그 후 심리상담소와 정신과를 전전하면서 관련 책들도 찾아보면서 자신의 병을 알아가고 스스로 힘을 내는 방법들을 찾아보게 된다.
참고로 저자가 걸린 질병의 이름은 '2형 양극성 정동장애'이다. 일상에서는 조울증이라고 한다. 조울증에는 1형과 2형이 있는데 1형은 조증과 울증이 번갈아 나타나고, 2형은 그보다 가벼운 경조증과 울증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조울증은 우울증보다 병의 정도가 한 단계 깊어진 상태이다.
이 책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니>에는 고태희를 집어삼킨 우울의 검은 파도들이 - 자해, 자살 시도, 폐쇄병동 입원 등, 그녀가 힘겹게 헤쳐 나온 날들이 솔직하고 처절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오늘도 조울의 찌꺼기들을 하나씩 떼어내겠다고 결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 이렇게 하나씩 달라져 나가야지, 이 망할 조울증에 매여 있을 수는 없지.’ 경쾌한 단발머리로 변한 것처럼 나에게 거추장스럽게 매달려 있는 조울의 찌꺼기들을 하나씩 떼어내겠다고 결심했다.
-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니. 저자 고태희가 용기 내어 단발머리를 하고 난 후의 결심
고태희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예쁨 받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고 전교 1등도 했다. 엄마의 칭찬을 기대하며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설거지가 안되어 있으면 설거지를 했고 자잘한 집안일을 도왔다. 동생도 보살폈다.
인하대에서 서울대학교 대학원 입학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의 바람을 저버리지 못한 그녀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학생활을 보냈는다는 걸 증명한다. 그녀는 인증욕구가 유달리 강했다. 부모에게, 선생들에게, 주변인들에게, 주어가 내가 아닌 삶을 살았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그런 만큼 착한 딸 콤플렉스도 심했다.
우울증은 한 가지 일로 생긴다기보다 과거의 여러 가지 일들이 복합되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정신과 의사인 린다 개스크는 <당신의 특별한 우울>에서 우울의 이유로 취약성과 스트레스를 들었다. 취약성이란 얼마나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높은가를 의미하며 가족력, 유전, 그리고 어린 시절의 경험 등에 의해 좌우된다고 한다.
저자 고태희는 자신의 취약성으로 인정에 대한 욕구가 컸던 것을 꼽았다. 이 책을 읽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기대는 언제나 독이 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라면 특히 아이의 인증욕구를 교묘하게 부추기는 일이 없는지 항상 조심해야 한다.
또 우울증 환자를 괴롭히는 것은 우울증만이 아니며, 선의의 충고도 우울증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섣부른 조언이나 위로는 우울증 환자에게 날카로운 송곳과 같이 만신창이가 된 심장을 한 번 더 찌를 뿐이라는 저자의 말을 새겨두어야 한다.
논외로 <힘을 낼 수 없는데 힘을 내라니>를 읽고 이 책에 등장하는 그 스타트업은 하루빨리 망해버리기를 바랐다. 배울만큼 배웠다는 놈이, 세상에 그렇게 나쁜 놈이 있을까, 분노가 치민다. 만에 하나 그 스타업이 성공이라도 하여 대기업이 되면 얼마나 많은 제2, 제3의 고태희가 생겨날까 생각하니 끔찍하다.
스스로 용기를 내어 살아가는 고태희를 마음을 담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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