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무물, 나의 불성실함
이 글 제목은 '로그라인엑스 블로그 3개월 운영 후기' 쯤이 되었어야 마땅한데, 나의 불성실함으로 인하여 '불성무물, 청춘의 사자성어, 로그라인엑스'라는 이상한 제목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게 되었다.
1일 1포스팅을 두 달 가까이까지는 그런대로 지킨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성실함은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작심석달? 제일 처음이 언제였더라? 글 올리는 걸 하루 쉬었더니, 다음에는 이틀마저 쉽게 쉬었다. 일이 그렇다 보니 사흘 쉬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반성을 촉구하자는 뜻에서 나의 십 대 시절을 사로잡았던 사자성어, 불성무물(不誠無物)을 소환한다. 불성무물을 정확하게 어떤 경로로 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심장박동이 아주 빨라졌다는 걸 지금도 느낀다.
불성무물이라는 사자성어의 그 강렬함이 내 청춘의 시기까지 점령했다.
불성무물 출처와 뜻
불성무물은 중용(中庸)에서 따온 사자성어다. 중용에 불성무물이 등장하는 문장은 아래와 같다. 만물의 시작과 끝이 성이니까, 귀히 여기라는 말이다.
誠者物之終始(성자물지종시) 不誠無物(불성무물), 是故(시고) 君子誠之爲貴(군자성지위귀)
- 중용(中庸)
성실함은 사물의 시작이자 끝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성(誠)을 귀하게 여긴다.
중용은 성(誠)을 사물의 시작과 끝으로 본다. 현대 물리학은 빅뱅을 우주의 기원으로 보지만 성을 우주의 기원으로 본다는 것, 이 얼마나 매력적인 견해인가. 동양철학자들은 말로만 무성한 뻥카를 곧잘 친다. 불성무물의 철학적 해석을 둘러싸고도 침 튀기며 싸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단순하게 해석하는 걸 좋아한다.
성이 없으면 물이 없다! 그렇다면 물이 없어지게 하는 성(誠)이란 무엇인가? 한자 성(誠)은 말(言)과 이룸(成)이 합쳐져 된 말이다. 즉, 말을 이루는 것이 성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지고지순하고 고단한 언어인가? 말을 했으면 실천을 하라는 것이 성(誠)이다. 그걸 끝까지 구현할 수 있는 인간, 지구 위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가장 쉬운 예를 하나만 든다면,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사랑을 하는 것이 성(誠)이다.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바람을 피우면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상태가 성(誠)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해도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것이 성(誠)이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불성무물과 상응하는 아포리즘
불성무물과 상통하는 아포리즘은 동서고금에서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성경 창세기는 '하느님께서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말이 빛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고 꽃을 만들었다니 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독일의 실존주의 대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 낱말이 붕괴된 곳에는 사물이 없다고 했다. 1980년대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홀로서기'의 시인 서정윤은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라고 다짐했다.
그러니 내 청춘의 한 모퉁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팔 할은 불성무불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나치에 부역했고, 김춘수는 신군부에 부역했다. 서정윤은 여중생인 제자들을 성추행하여 교단을 떠났다. 1
꽃처럼 아름다운 말의 향연이 얼마나 매섭고 구역질나는 일인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너무나 뒤늦게 깨달았다.
인간, 그리고 인생이라는 것
하여, 지금은 불성무물을 그저 말장난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유학자들이 밥 먹고 하는 일이 말장난이었다고, 노예를 부려먹던 그리스 철학자들도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그래도 뭔가 찜찜했다. 아니 1일 1포스팅을 다짐해 놓고 완수를 하지도 못했는데 모른 체하고 슬쩍 운영기를 올리면 너무 뻔뻔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래서 양심상 제목을 바꿨다. ㅠ
맞다. 나는 뻔뻔하고 불성실하다. 그러나 인생은 불성무물이라는 단 하나의 사자성어로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불성실함이 인생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인생은 성공의 연속이 아니라 실패의 연속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백사장 모래알 같이 많은 인생의 날들에서 매일을 결코 성실할 수 없는 존재다.
오히려 단 하루라도 게으르지 않고 성실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무수한 게으름 속에서 인간은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오늘 하루를 견디어 내며 그래도 죽지 않고 산다. 무수한 실패 속에서 인간은 눈물을 흘리며 오늘을 산다. 그러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대박을 쳐서 성공한 인물이랍시고 텔레비전에도 나온다. 정치판에서는 대통령도 되곤 한다.
글을 쓰다 보니 자꾸 전개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ㅋ 아무튼, 내 말의 결론은 이렇다. 게을러서 작심삼일을 해도 좋고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해도 좋으니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렇다고해서 자신을 송두리째 잊어버려서 자신의 영혼마저 팔아먹어 버리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또, 사랑했다고 말했다고 해서 평생을 옭매일 필요는 없다. 사랑도 감정에 불과하다. 감정은 수시 때때로 변하지 않던가. 자신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을 필요도 없다. 말은 그냥 말일뿐이다. 빛이 있으라 했더니 빛이 생겼고,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느니,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꽃이 되었더라는 말은 그저 다 헛소리에 불과한 말의 요란한 성찬이다. 꽃은 당신이 불러 주기 훨씬 이전부터도 언제나 꽃이었다는 걸 잊지 마라.
로그라인엑스 블로그 3개월···.
로그라인엑스 블로그를 7월 7일 개설했으니 운영한 지 만 3개월이 됐다. 어제까지 페이지뷰는 39,095, 구독자수는 44이다. 처음에는 페이지뷰를 공개하는 것이 쪽 팔렸는데(한국인의 고질병이다), 지금은 괜찮다.
페이지뷰가 3천이면 어떻고 3만이면 어떻단 말인가. 아니 3백만, 3천만이면 또 어떻다는 말인가.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블로그도 당연히 그러할진대 쪽팔려 할 필요는 없다. 그저 투명성 차원에서 걸어둔다. 혹시 궁금해 하실 분이 있을까봐서. 그래서 걸어두긴 하는데······.
신혼 때 가훈 짓기가 유행했었다. 불성무물이 가훈으로 근사하지 않냐고 했더니, 복이(촌스럽기 그지 없는 이름이지만 정감가는 아내의 이름이다)는 기겁했다. "아니 왜? 나는 성실할 자신 없거든. 애들한테도 강요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청춘의 어느 한 모퉁이에서는 불성무물, 존재를 걸어도 좋은 사자성어이지 않을까 여전히 생각한다. 세상은 늘 빈 말만이 지겹도록 난무하고 있으므로.
관련글
- 베스트셀러 작가 김훈도 전두환 찬양 기사를 썼다. 우리 역사의 질곡이다. 그러나 그땐 다 그랬다고 치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부역으로 호사를 누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誠)을 버리지 못해 고문치사에 이른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지겹다 싶을 정도로 사과하고 또 사과한다. 미당 서정주를 비롯해 이 땅에서 소위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사과를 최소한 독자에게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본과 무엇이 다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본문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