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끝났다. 아들은 오늘 학교로 돌아갔고 딸은 내일 서울로 간다. 연휴는 나흘이었지만 7일 귀성한 딸에게는 일주일인 셈이다. 일주일 동안 아이들 외가 나들이 외에는 내내 집에 있었지만 정말 후딱 가버렸다.
딸이 웬일로 먼저 등산을 가자고 했다. 추석 날, 아들딸과 아내가 뒷산을 갔다 왔다. 늘 그렇듯 그날도 나는 늦잠으로 가지 못했다. 그다음 날은 모자만 다녀왔다. 딸은 딱 한번 등산을 하고는 피곤하다고 발뺌을 했다. 이 몸은 가족 등산에 단 한 번도 동참하지를 못했다. 매일 밤 맥주를 마셔야 했고, 매일 아침 늦잠을 자야 했으므로.
이번 추석에는 아들딸이 어쩐 일인지 외가에 따라나섰다. 딸이 적극적이었다. 딸은 용감하게도 외삼촌과 외삼촌의 사촌과 대작을 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선언했다. 부모에게는 연애에 대해 말을 아끼던 딸애가 뜬금없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그랬다.
추석, 한자어로만 보면 가을 저녁이니 정감 어린 명절이다. 가을의 달빛이 가장 아름다운 밤이니 딸의 연애도 이해할 만하다. 서울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는 줄 알았는데, 낭만이 있었나 보다. 낯선 서울에서 마음을 주고받을 남자 친구가 생겼다니, 서울 생활이 그렇게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니겠다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 엄마가 딸의 연애사가 하도 궁금하여 이름이며 다니는 학교는 어딘지, 착한 지, 잘 생겼는지(이런 걸 왜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으나)를 물어봤으나 딸애는 질색만 할 뿐이었다. 딱 하나 겨우 알아낸 건 지 오빠와 나이가 같다는 것. ㅋ
이번 연휴에는 매일 늦잠을 자는 통에 짜장 카레 요리밖에 하지를 못했다. 딸은 귀성 첫날 참치찌개와 계란찜을 맛있게 먹었고, 아들은 귀성 첫날 LA 쇠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이어진 날들은 처가에서 가져온 고등어와 잡채 외에는 짜장 카레로 때웠다.
추석 명절에 우리 가족을 구원한 것은 노랑 통닭이었다. 딸이 추천했다. 대학 기숙사에서 친구와 맛있게 먹었다고, 자극적이지 않고 기름지지 않은 담백한 맛이 은근 중독성이 있었다.
기차표 예매를 하지 못한 아들은 고속버스를 이용했다. 연휴가 끝나니 아들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나았다. 학생이나 직장인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아들을 바래다주고 아내와 삼귀 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다 중간에서 그만 돌아왔다.
처가에서 돌아올 때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100년 만에 가장 둥근 달이라더니 크긴 커 보였다. 딸이 차 세우고 인증숏 찍어야 되지 않냐고 했지만 그냥 왔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바로 왔는지 조금 후회되기도 한다. 이렇게 크고 둥근달은 2060년에야 볼 수 있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과연 내가 살아 있을까.
이번에는 아들이 미리 짐을 챙기고 했지만 면도기를 빠트렸다. 꼭 하나씩은 잊어 먹는 거 같다. 아들이 면도를 하는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아직 아이 같은데 말이다. 남자에게 면도는 뭘까? 안 해도 상관 없지만 남자라면 매일매일해야 되는 면죄부 같은 걸까.
아들도 이렇게 달빛 좋은 가을밤을 나눌 여자 친구가 생겼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딸이라도, 달빛으로 물드는 가을밤, 서울 하늘 아래에서 아프지 않고 청춘의 사랑을 하다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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