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글판 문안선정위원회가 엮은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교보문고, 개정증보판 2020)는 1991년 1월부터 시작된 광화문 글판의 30년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광화문글판은 일 년에 네 차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 옷을 입는다. 광화문 글판은 누군가에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선사했고, 누군가에는 잠시 이웃과 인생을 돌아보는 여유를 선사하기도 했다.
고 이어령은 "도심의 큰 건물에 구호나 속담이 아닌 문학성 풍부한 구절을 지속해서 노출한 경우는 외국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광화문글판은 대중에게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동시에 글판 서체 또한 다양하게 시도해 한글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책의 구성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그간 우리가 보아온 광화문글판 속 시인 9명의 인터뷰를 실었다. 시인 나태주는 광화문 글판의 시 <풀꽃>이야말로 오늘날의 시인을 있게 해 준 중요한 계기 가운데의 하나라고 회고했다. 광화문 글판에 풀꽃이 실리면서 책이 잘 팔렸고 강연도 자주 다니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나태주 시인이 초등학교에서 있을 때 아이들과 글짓기 공부를 하며 풀꽃 그림을 그리면서 아이들에게 해준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적은 문장이 시 <풀꽃>이 되었다는 일화를 읽을 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시 풀꽃은 역대 광화문 글판 중에서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글판이 되었다.
1부에는 시인 정현종, 백무산, 장석주, 천양희, 이준관, 정호승, 허형만, 김사인 광화문글판 속 작품에 관한 이야기들과 근황들이 담겨 있다.
2부 ‘우리가 사랑한 글판들’에서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을 수놓은 글판 이미지와 시, 노랫말, 동화, 에세이 등 광화문글판에 실린 글의 원문 전체를 만나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 <44>를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시를 읽으며,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왜 우리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라는 회한도 묻어났다.
44, 파블로 네루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내 어린 시절이 죽었을 때
왜 우리는 둘 다 죽지 않았을까?
만일 내 영혼이 떨어져 나간다면
왜 내 해골은 나를 좇는 거지?
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는 더없이 반가웠다. 이 시는 2015년 겨울 광화문 글판에 실렸다. 그녀는 자신이 가본 적 없었던 나라의 큰길에 자신의 시가 실리리라는 걸 예감했을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춘향전을 읽고 열녀 중의 열녀라고 감탄한 서평을 남긴 인연이 이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 2015년 겨울 광화문 글판
두 번은 없다 Nic dwa razy,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게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3부 ‘우리가 사랑한 이야기들’에는 광화문글판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작들과 광화문글판이 새 옷을 갈아입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광화문글판 제작과정
광화문 글판은 25자 안팎으로 문안을 선정하고, 글판 디자인 시안은 보통 30~40종에서 2~3종의 후보 시안을 추려낸 다음, 최종 시안을 결정한단다. 글판의 크기는 신문지 800배 크기로 가로 20m, 세로 8m로 출력에만 5시간이 걸리고 설치에도 4~5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긴 여정을 거쳐 탄생한 짤막한 문장은 보는 이에 따라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시가 지닌 힘이다. <광화문에서 읽다 거닐다 느끼다>를 다 읽고 나니, 한 권의 시선집을 감상한 것 같다. 광화문 글판은 어느덧 시민들에게 익숙한 문화콘텐츠가 되었다. 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최근 광화문 글판 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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