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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야기/한국소설

하얼빈 김훈 문장과 소설적 재구성의 한계

by 로그라인 2022. 10. 4.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의 문장과 소설적 재구성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다룬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 2022)은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전날 트위트에 광복절 연휴에 읽으면 좋은 소설로 추천하면서 현재까지 8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달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천하는 이유를 “하얼빈역을 향해 마주 달려가는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여정을 대비시키면서, 단지 권총 한 자루와 백 루블의 여비로 세계사적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섰던 한국 청년 안중근의 치열한 정신을 부각했다”라고 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 방송에서 김훈의 첫 장편소설 <칼의 노래>를 추천했고, 탄핵 당시 칼의 노래를 다시 읽고 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며 소설 칼의 노래는 그해에만 50만 부를 넘어서며 대박을 쳤다. 

그래서인지 보수성향의 김훈은 세월호 참사 이후 약자의 편에 서서 정부를 비판하고 약자들을 보듬는 행보를 보여왔다. 대의를 위해 살아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주로 썼고, 대의를 위해 살아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의 소설을 추천하는데, 정작 소설가 김훈 자신은 대의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세상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책표지

소설 하얼빈 줄거리

작가의 말에서 김훈은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과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라고 밝혔다. 

소설 하얼빈의 줄거리를 축약하면 이렇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소설은 1908년 1월,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이 일왕을 접견하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에 대한 사형집행으로 끝난다. 마지막 문장은 고향 사람들의 기도문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이다. 안중근은 죽어서 '망자'가 되었다. 그것이 이 소설의 결어다.

소설은 죽음의 자리, 하얼빈 역으로 향하는 두 남자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안중근은 신천에서 출발하여 서울과 부산을 거쳐 연추, 블라디보스토크, 수분하를 지나 하얼빈에 도착한다. 이토는 시모노세키에서 대련을 경유하여 봉천, 장춘, 채가구를 지나 하얼빈에 도착한다.

이토는 안중근에게 죽어야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안중근은 이토를 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흔히 말하는 '대의'일 것이다. 안중근은 대의로 이토를 쐈고 이토는 대의에 의해 죽었다.

그런데 소설을 아무리 주의 깊게 읽어보아도 안중근의 '대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은 단 한 토막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한 인간으로서, 인간을 죽여야 하는 인간적인 갈등을 서술하는 단락을 한 페이지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소설 하얼빈 89쪽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 생각했다.(88~89쪽)

위 문장에서는 안중근의 고민 어디에도 약탈로 고통스러워하는 조선 동포가 보이지 않고, 조선 독립에 대한 염원도 보이지 않는다. 하얼빈에서 그려지는 안중근의 삶에는 철저하게 '대의'가 빠져 있다.

안중근은 서른한 살의 청춘을 통째로 '대의'에 바친 대한국민의 청년이었다. 그러므로 작가가 대의를 빼고 안중근을 서술하고자 했던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던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안중근의 삶 자체가 온통 '대의'였으므로 '대의'를 소거하고서도 안중근의 삶은 과연 서술될 수 있을까? 

하얼빈, 소설적 재구성의 한계

식민지 근대화론의 그림자

소설 하얼빈 78쪽

하얼빈만큼 숙독한 소설도 없는 것 같다. 아무리 다시 읽어봐도 식민지 근대화론의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주의 깊게 읽고 또 읽었다. 

작가는 "이토는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때 똥냄새에 질겁을 했다."라고 서술했다. 아마도 소설 하얼빈에서 가장 장황하게 서술한 에피소드가 이토가 지시했다는 '서울 도성의 위생에 관한 명령'[각주:1] 일 것이다. 작가가 주석에서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이 에피소드는 작가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이토는 통감부와 조선 조정을 거듭 다그쳤으나 거리는 여전히 똥바다였다는 사실을 작가는 왜 장황하게 서술했을까? 소설 하얼빈은 전체적으로 팩트를 최대한 간결하게 서술해 나갔는데, 이 부분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가 소설 맥락을 매끄럽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이토는 문명개화국에서 온 문화인이었고, 조선은 온통 똥 냄새가 베인 미개한 나라란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런 불길한 징후는 소설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만세일계하는 존엄의 핵심부는 늘 텅 비어 있고 고요해서 작동함에 거침이 없었다. 황궁 숲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눈 쌓이는 소리가 들렸다."(128쪽)

작가는 일왕을 일본이 부르는 데로 천황이라고 불렀고, 그 궁을 만세일계하는 존엄의 핵심부라고 표현했다. 일왕의 목소리는 옥음이라고도 했다.

'만세일계'의 뜻을 찾아보니, 일본 황실의 혈통이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로 1867년 이와쿠라 토모미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한다. 즉 만세일계는 일왕을 절대적인 존재로 부각하는 술어였다. 작가에게 일왕의 궁궐은 존엄한 곳이고, 일왕의 목소리는 옥음(옥처럼 맑고 아름다운 소리)으로 들렸던 것일까?

설마, 우리 시대의 인기 작가가 그럴 리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독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그의 문장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그림자는 끝내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나의 오독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주인공보다 안타고니스트

소설은 대개 주인공과 안타고니스트(반동 인물)의 대립과 갈등으로 이야기를 추동해 간다. 소설 하얼빈에서 주인공은 안중근이고 안타고니스트는 이토 히로부미이다. 주인공과 안타고니스트가 그 힘이 비등할수록 대립하는 긴장감은 극에 달하며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런데 주인공 안중근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개 포수로 그려지면서 납작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예컨대 작가가 대의를 빼버리자고 방침을 정했으니,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무명지를 끓어 결의한 그 유명한 단지동맹 조차도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이 넘어갔다. 안중근의 삶에서 그런 결기와 결의를 빼고 나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 청춘을 설명할 수 있을까?

반면, 이토는 만세일계하는 존엄의 핵심부에서 동양의 문명 근대화를 위해 파견된 문명 권력을 가진 선각자마냥 묘사된다. 심지어 이토의 죽음마저도 고요하고 단정했다는 신문기사를 작가는 인용한다. 일본 화류계의 늙은 게이샤가 이토를 흠모했다고, 교토 하류계의 슬픔은 더 깊고 우아했다는 지방지 기사까지 인용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소설 하얼빈 207쪽

그러니, 나로서는 주인공이 안중근인지 이토인지 헷갈릴 지경이었고, 극적 긴장감도 느낄 수 없었다.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소설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혼자의 힘으로 이토를 저격한 것으로 묘사된다.

소설에서는 안중근이 권총으로 동포를 위협하여 거사에 소용될 여비 백 루블을 강탈했다고도 나온다. 작가는 일본 검찰관이 작성한 안중근의 심문조서를 보고 그렇게 믿었을 것 같다. 그러나 독립투사라면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후원을 받았더라도 강탈했다고 진술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아무리 소설적 재구성이라고 하지만 이토를 저격하는 데에 동지들의 물밑 후원과 보이지 않는 연대가 있었을 것인데, 그것을 깡그리 소거한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지난했던 독립투쟁사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그 연대를 소거하고, 대의마저도 제거하고 개인에 집중하다 보니 이토를 저격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치 운이 좋아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우연에 의해 성공한 개인적인 사건으로 격하되고 만다.

작가 김훈의 문장들

나는 관념 속으로 빠져드는 김훈의 늘어진 문장은 경계했으나 풍경의 핵심을 파고드는 고아한 문장들은 좋아했다. 풍경 묘사에 관한 한 김훈은 제일급이다. 소설 하얼빈에서도 그런 문장들을 몇 단락 찾을 수 있었다.

소설 하얼빈 149쪽

안중근은 거사 전에 하얼빈으로 식솔들을 불렀다. 처자식이 다 갈 수 없어 큰딸 현생은 서울 명동성당 수녀원에 맡기기로 했다. 안중근의 친동생 안정근이 현생을 수녀원에 맡기고 돌아와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이 지극한 이산의 아픔을 김훈은 놀랍도록 간명하게 전개하여 독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김아려의 표정은 정돈되어서 움직임이 없었고, 안정근이 돌아가자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이 얼마나 터지는 슬픔의 표현인가.

소설 하얼빈 194쪽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저격하고 체포된 후 관동 도북부 여순감옥 이송되는 열차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작가는 비어서 헹한 11월의 대륙 풍경을 짧은 문장에 그대로 살려내었다.

대륙이 말라서 버스럭거리다니, 그 누가 저 문장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소설 하얼빈 25쪽

1905년 12월, 안중근은 상해에서 고향으로 가기 위해 기선을 타고 진남포에 내렸다. 바람에 가랑잎이 쓸려가고 사람 사는 집에서 저녁연기가 오르는 풍경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대목에서 가슴속에서 고향이 응어리짐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소설 하얼빈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장은 고아하나,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본질은 헛헛하기 그지없구나. 그래서 한자어를 이렇게도 많이 동원한 것인가, 하는 생각.

소설가 김훈 프로필과 작가의 다른 역사소설 흑산 

김훈 역사 소설 흑산 독후감과 작가 프로필↗

  1. 19세기 런던의 거리도 말똥으로 넘쳐났다. 파리 거리도 더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토가 위생 명령을 지시한 것은 그가 문화인이어서도 아니고, 조선 사람들의 보건 위생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민간의 분뇨처리업을 빼앗아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추정하는데, 작가는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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