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자라서 엄마가 되고, 아들은 커서 아빠가 된다는 말이 있다. 어제 아들이 "오늘 집에 갈게요."하고 톡을 넣었을 때 아들을 손님처럼 여기는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들이 집에 온다는 말을 듣고 샤워를 한 후에 집안 대청소도 하고, 이발도 하고 수염도 깎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 아들딸은 커서 손님이 되는 걸까.
6시에 도착한다고 했으니 그 모든 것을 하기에 시간은 충분했다. 공지영의 장편소설 <먼바다>를 마저 읽고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소파에서 느긋하게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소설을 읽고 있는 내 배 위에 냥이 코코가 올라오더니 이내 가르릉 소리가 들렸다. 그 가르릉 거림은 만추의 오후와 몹시 잘 어울려서 온몸이 몽글몽글해졌다.
사방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아 눈을 번쩍 떴을 때 거실 창밖으로 이미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있는 게 아닌가? 어이쿠 내가 낮잠을 너무 오래 잤나보다, 시계를 봤다. 시간은 정확하게 오후 6시.
황급히 자동차 키를 돌리며 아들에게 추우니까 밖으로 나오지 말고 역 대합실에서 기다려라고 문자를 했다. 백미러를 보니 머리는 까치집을 짓고 있었고 수염은 더부룩했다.
"많이 기다렸지? 아빠가 깜빡 잠이 들었다"
"깜빡이 아닌 것 같은데?"라고 아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문프 같아요."
"하루 면도를 안 했더니 이 모양이 돼버렸네···."
그리고 삼겹살을 구워 먹으려 식당으로 직행했다. "출발할 때 역 식당에서 라면 한 그릇을 사 먹었는데 오천 원이더라. 커피 한잔 했더니 만원이었어요."라며 아들이 물가가 장난이 아니더라고 했다.
물가는 잠시 잊고 삼겹살을 열심히 구웠고 아들은 맛있게 먹어줬다. 소주 한 병과 콜라 한 캔을 각각 마시고 된장찌개까지 비웠더니 배가 불렀다.
학교 생활을 열심히 이야기하던 아들이 최근에 읽은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이야기가 꽤 강렬했다며 공지영의 <먼바다>는 어땠는지 물었다.
글쎄, 재미있는 연애소설이긴 한데, 낮잠을 쫓아낼 정도로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ㅎㅎ
술이 적당히 올랐고, 집에 오자마자 면도를 하고 샤워를 했다. 아들방에 있던 내 이불을 딸 방으로 옮기고 또 잠에 곯아떨어졌다. 이번엔 술기운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잠만 잤구나. ㅋ
새벽에 깼을 때 더글라스 맥아더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그도 자녀가 손님으로 느껴졌었던 적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맥아더 "자녀를 위한 기도문" 전문
주여, 저의 아이가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신의 약함을 알 수 있을 만큼 강하게 하시고 두려울 때 자신을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하게 하시고 정직한 패배에 당당하고 굴하지 않으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소원하기보다 행동으로 보이며 주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본임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기도하오니 그를 편하고 안락한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과 도전의 긴장과 자극 속으로 이끌어 주소서. 폭풍 속에서 의연히 서 있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실패한 이들에 대한 연민을 알게 하소서.
마음이 깨끗하고 목표가 높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남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 웃는 법을 알면서도 우는 법 또한 잊지 않는 사람 미래로 나아가지만 과거 또한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뤄진 후에도 넉넉한 유머감각을 더해 주셔서 늘 진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너무 심각한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아이에게 겸손함을 주셔서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함에 있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늘 잊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버지인 저는 감히 “내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라고 속삭일 수 있게 하소서.
맥아더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은 그의 삶과는 다르게 거의 완벽하다. 기도문대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싶다. 인간이 닿지 못할 성인의 경지에 자녀가 올라서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노욕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렇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욕심을 멈출 수 없다.
우리 집 애들은 고등학교 때부터 집을 떠나서 기숙학교에서 생활했다. 중학교 때까지 품 안에 자식이었던 셈이다. 아들을 마치 손님처럼 여겼던 내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자식들이 훌쩍 커버린 탓일까...
아무튼 아들딸이 집에 오면,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내일은, 아니 오늘은 <먼바다>도 마저 읽고, 집안 대청소도 하고 대형마트에 가서 쇠고기며 간식거리도 잔뜩 사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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