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12분, 아들은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한 시간 뒤 오후 4시 35분, 딸이 중앙역에 도착했다. 폭설 탓인지 기차는 7분 늦게 도착했다. 한 시간을 텀으로 아들은 식구에서 가족이 되었고, 딸은 가족에서 식구가 되었다.
식구와 가족의 차이
가족 家族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또는 그 구성원.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다.
식구 食口 1.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2. 한 조직에 속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전적 정의에서 보듯이 가족은 주로 혈연으로 이루어진 법적인 관계를 말하고 식구는 먹고사는데 방점을 찍은 사회경제적인 의미가 짙은 용어다.
가족문화, 가족여행, 가족관계증명서처럼 가족은 주로 한자어와 친하다. 식구문화, 식구여행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조폭영화에서 식구가 많이 쓰이는 바람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지만 나는 식구라는 말이 좋다.
아들은 22일 왔다 오늘 갔으니 5일 동안 가족에서, 한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식구가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식구가 불어나는 건 요리를 잘하지는 못하는 내게는 고역이다.
기껏해야 고기를 구워주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식구의 밥상을 준비하는 과정의 즐거움은 행복의 원천이 아닐까 한다. 아내와 합심해서 난생처음 고등어조림을 시도해서 완성해냈으니까.
장기 계획이 가능할까
5일 동안 한 식구가 된 아들은 학문의 길을 한번 가보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계획은 취업에 도움이 되는 석사만 따고 바로 취업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런데 공부를 하다 보니 순수하게 학문을 하고 싶어 졌다는 거다.
석박통합과정이래도 5년이 걸리는데? 그럴 거면 군대는 왜 갔냐고? 이공계는 박사까지 하면 전문연구요원으로 군면제를 받을 수 있는데, 아까운 청춘의 2년을 아무 생각 없이 허송세월했다는 말이니?라는 말이 목구멍에 넘어왔으나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더는 공부하기 싫다고 군대 갈 때는 언제고···.
생각해보니 나 또한 살아오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것이 없다시피 했으므로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들만큼은 자기 진로에 대한 장기적 관점에서 최소한의 경로 계획에 따라 살았으면 했다.
생각해보면 장기적 관점은 우연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아예 가질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는다"라고 말했을까. 인간은 그저 우연과 인연에 의지해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아들이 가고 나서 아들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종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식만 빼곡히 적힌 종이들을 보자, 왠지 모르게 안 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수학을 좋아했었지, 이젠 아닌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아들은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를 타기 직전,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 아들이 오늘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위치추적 앱 젠리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아들의 상태를 "집에 가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위치추적 AI에게는 기숙사가 집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집에 가는 중"이라는 멘트를 보았을 때도 짠했다.
그래 맞다, 지금은 기숙사가 아들에겐 집이다. AI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 국어사전도 아주 많이 수정될 수밖에 없음을 젠리가 말해 주는 듯했다.
우선순위 체크리스트
인간이 장기적 관점을 견지하기 어려운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하루 일과만 보더라도 계획한 시간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나태함은 둘째치고 온갖 방해 요소들이 끼어들지 않던가. 오죽했으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까지 생겨나겠는가?
하루 일정이 그러한데 장기 프로젝트는 말할 것도 없다. 행동경제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1년 기한으로 시작한 장기 프로젝트는 6개월이 늦어지고 1년 이상 늦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심지어 어느 세월에 완성이나 할 수 있을까라는 프로젝트도 수없이 많다. 그게 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그럼에도, 실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장기적인 계획의 완성도를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그날의 우선순위 체크리스트를 부단하게 체크하는 수밖에 없다.
매일, 그날 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꾸준하게 체크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스스로의 게으름을 예방할 수 있다.
나는 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으므로 오늘 꼭 해야 하는 3개의 우선순위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매일 점검하기로 했다. 그래야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3개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매일의 우선순위 체크리스트에는 유감스럽게도 블로그 글쓰기는 없다. 아주 중요한 시기에 아무런 쓸데도 없는 1일 1 포스팅에 열을 올린답시고 정작 체크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을 아무 생각 없이 놓친 뼈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보면 주객이 전도된 비겁한 행위였다. 어쩌면 중요한 결정을 미루기 위한 도피성 글쓰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끊임없이 뇌에게 주며 자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가장 후순위에 뒀어야 할 블로그 글쓰기를 최우선 순위에 둔 대미지는 너무 컸다.
그나저나 당장 내일, 아니 오늘 아점 메뉴는 뭐가 좋을까 벌써부터 고민이 된다. 이제 식구가 된 딸의 식성이 까다롭기 때문에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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