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와 데미안
장편소설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40대 초반에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기 위해 쓴 자전적 작품이다. 당시 헤세의 아내와 아들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고, 작가 자신도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에게 심리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작품 속에는 집단 무의식이나 꿈과 만다라의 상징 등 융파의 심리학적 요소들이 짙게 배어 있다.
소설 주인공인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1919년 출판한 <데미안>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폰타네 문학상을 수상했다. 가명으로 발표한 이유는 1차 세계대전 후 비난에 시달렸기도 했고 오직 작품성 만으로도 인정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대성공한 셈이었다.
당시 평론가 코로디가 텍스트 분석으로 이 소설은 헤세가 쓴 것이라고 밝혀내자, 헤르만 헤세의 이름으로 <데미안>은 재출간되었다. 대단한 작가에 대단한 평론가다.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고 맨날 애먼 소리만 하지 말고, 코로디쯤 되어야 평론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헤르만 헤세(Herman Hesse) 프로필
1877년 독일 남부 칼브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문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학교에서 도망쳐 나왔다. 15세 때 자살을 기도해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했다. 이후 작품을 발표하기까지 시계 공장 수습공, 서점 점원으로 일했다.
1899년, 첫 시집 <낭만의 노래>와 산문집 <한 밤중의 한 시간>을 발간했다. 1904년, 첫 장편소설 <페터 키멘 친트>를 발표했다. 이후 <수레바퀴 아래에서>(1906),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황야의 이리>(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1930), <동방 여행>(1932)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3년에 걸쳐 집필한 대작 <유리알 유희>를 1943년 발표했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1962년 8월, 제2의 몬타뇰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헤세는 토마스 만, 프란츠 카프카와 함께 20세기 독일의 3대 고전작가로 꼽히고 있다.
본 리뷰에서 인용하는 작품 속 문장들은 모두 데미안(김시오 옮김, 브라운힐, 2011)에서 인용했다. 다만 압락사스는 널리 쓰이는 '아브락사스'로 고쳐 표기하였다.
아브락사스(ΑΒΡΑΞΑΣ)는 고대 그리스어로 각각의 글자는 일, 월, 수, 금, 화, 목, 토를 상징하고, 일곱 글자를 합산하면 365가 된다는 해석에 따라 주술적인 주문으로 많이 쓰였다.
유대교나 기독교에서는 악마라는 설이 있으나 그노시스파 등은 365일 관장하는 천사, 혹은 신으로 봤다. 아브라카다브라도 아브락사스에 나온 단어로 추정된다.
미르북컴퍼니는 2013년 데미안을 한글 완역본과 영문판 세트로 출간했다. 한 권으로 들고 다니기 편하게 편집했다. 헤세만큼 우리나라에 작품이 많이 번역된 작가도 없는 것 같다.
줄거리
싱클레어와 프란츠 크로머, 그리고 데미안
소설은 중년의 '에밀 싱클레어'가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랑과 의무, 온화함이 넘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싱클레어는 한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를 다니고 있다.
싱클레어는 비록 열 살이었지만 부모님의 세계, 청결하고 경건한 생활이 지향하는 환하고 밝은 선의 세계가 있는 반면, 거리의 부랑자들과 주정뱅이들, 도둑 때들이 속한 야만적이고 잔인한 어두운 악의 세계가 대립하면서도 그 두 세계가 아주 가까이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싱클레어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것을 알면서도 열정과 성급함에 자주 사로잡혀 금지된 그 악의 세계에 빠져들고 싶은 유혹을 자주 느낀다.
싱클레어가 열 번째 생일이 막 지났을 때, 열세 살쯤 된 억세고 거친 '프란츠 크로머'에게 그가 나를 받아들여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취급해 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물방안 간 옆에 있는 과수원의 품질 좋은 사과를 커다란 자루로 하나 가득 훔쳤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것도 하느님을 걸고 맹세까지 했다.
프란츠 크로머는 그를 받아주기는커녕 싱클레어에게 2마르크를 요구한다. 싱클레어가 2마르크만 주기만 하면 과수원 주인에게 일러 받치지도,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큰돈이 없었던 싱클레어는 그날 이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매일밤 악몽을 꾸고, 점점 사악한 프란츠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다닌다.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참회와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싱클레어를 구원한 것은 '막스 데미안'이 전학오면서였다. 부유한 미망인의 아들이었던 데미안은 싱클레어보다 한 학년 위였고, 나이는 몇 살 더 많았다.
데미안은 또래보다 훨씬 총명했으며 자신감이 넘쳤고, 도전적이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애였다. 데미안이 전학 온 이후로 프란츠 크로머는 더 이상 싱클레어를 괴롭히지 않았으며, 그를 보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며 도망을 치기까지 한다.
그 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생 아벨이 비겁자가 그를 죽인 카인이 더 고귀한 영웅일 수도 있고, 예수 옆에 매달린 두 도둑의 이야기에서도 악의 세계에서 내내 살아온 자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는 것은 비겁한 기회주의자일 뿐이고, 오히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기꺼이 악마에게 벌을 받는 쪽을 기꺼이 택한 도둑이 더 나은 인간이라고.
방탕한 생활과 베아트리체
김나지움에 진학한 싱클레어는 처녀들과 경험이 많은, 심지어 문구점 야넬트 부인과도 경험이 있는 '알폰스 벡'과 친해지고, 대담무쌍하게 술집을 출입하는 주모자가 되어 술을 퍼마시고 허풍을 떨었으며 악덕을 쌓아 정학처분까지 받는 불량학생이 된다.
"하지만 너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것, 너의 생명을 형성하고 있는 그것은 이미 알고 있을 거야. 우리들 마음속에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우리들 자신보다 모든 것을 더 잘 해내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 데미안이 이 시기 싱클레어에게 한 충고(160~161쪽)
방탕의 소용돌이에서 싱클레어는 그의 마음을 끄는 한 소녀를 어느 봄날 공원에서 우연히 발견한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멋진 옷차림을 한 그녀는 영리한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숙하고 우아하고 윤곽이 뚜렷하고 완전히 숙녀 티가 나면서도 오만함과 소년다움이 있는 얼굴, 싱클레어는 그녀에게 단테가 평생을 두고 사모한 여인,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베아트리체를 멀리서 본 이후, 싱클레어는 술집 출입을 삼가게 되었고, 밤에 나돌아 다니는 방황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싱클레어는 그녀와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지만 그녀를 숭배하게 되고 그녀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시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게 되었고, 즐겨 산책을 할 수 있게 된다. 싱클레어는 모든 것에 정결함과 고귀함, 품위를 부여하고 진지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려 노력하는 사원 안의 기도자가 다시 되었다.
싱클레어는 몽환적인 붓놀림으로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선을 긋고 면을 채우며 초상화를 완성하고 벽에 초상화를 걸어두고 생활하게 된다. 완성된 그림은 절반은 남성적이었고 절반은 여성적이었으며, 나이를 초월한 모습으로 의지가 굳세면서도 꿈을 꾸는 듯한 신의 초상으로 보였다.
그 얼굴은 베아트리체가 아니었고, 데미안으로 보였다. 초여름이 되어서는 데미안이 아니라 싱클레어 자신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를 닮지는 않았으나 그의 운명, 혹은 그의 안에 내재하고 있는 수호신이었던 것이었다. 싱클레어는 초상화 밑에 그를 매혹시켰던 시인 노발리스의 잠언을 적어 둔다.
'운명과 마음은 하나의 개념에 붙여진 두 개의 이름이다.'
초상화와 살게 된 싱클레어는 자신이 베아트리체라고 이름 붙인 그 소녀와 이따금씩 마주치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않게 되고, 다시 막스 데미안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싱클레어는 고향집 현관 위에 있던 새가 그려진 문장을 데미안이 들고 있는 기이한 꿈을 꾸고는 그 새를 그려 데미안에게 편지로 붙인다. 얼마 후, 데미안에게서 짤막한 답장이 왔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행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삭스이다.'(169쪽)
데미안에 의하면 아브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신이다. 즉, 선과 악의 세계를 모두 관장하는 신이 아브락삭스이다.
그 무렵 싱클레어는 교회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아브락삭스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싱클레어는 그와 대화하면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서서히 그의 알껍데기가 부수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도, 그의 형상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무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오. 우리들 내부에 있지 않은 것은 우리를 진정으로 자극하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오."
- 피스토리우스가 싱클레어에게 자신의 내부에 집중하라며(211쪽)
그러나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를 궁극적으로는 만족시키지 못했다. 피스토리우스는 아브락삭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기는 했으나 전대미문의 것, 새로운 신들을 제시하는 일은 피스토리우스의 역량 밖이라는 걸 알고 그와 헤어진다.
"깨달은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 자기 자신을 찾고, 그러한 자신 속에서 더욱 견고해져서 어디를 가든지 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진실한 직분이란 오직 한 가지, 즉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다."(240~241쪽)
에바 부인과 종말의 시작
싱클레어는 H 시에 있는 H 대학에 입학했다. 저녁 늦게 한가롭게 시내를 걷고 있을 때 일본인과 대화하고 있는 막스 데미안과 재회한다. 이때 데미안은 우리는 '카인의 표식'을 이마에 갖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며 집으로 초대한다.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처음 만난 싱클레어는 비로소 자신이 목적지에 도달해 있음을 느낀다. 그녀의 목소리를 음미하며 그녀 곁에서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에 더없이 행복해했다. 그녀가 그에게 어머니가 되든, 연인이 되든, 여신이 되든 상관없이 그냥 거기 있기만 하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에바 부인에 대한 사랑이 갑자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활활 타오르고 가슴이 저려와 싱클레어는 모든 의식을 집중해 에바 부인을 생각했다. 바로 그때 데미안이 말을 타고 나타나 러시아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어느 이른 봄날 밤, 점령한 농가 앞 한 그루 포퓰러에 기대어 서서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응시하고 있던 싱클레어는 포탄에 맞는다. 싱클레어는 수레에 실려 벌판을 건너고 들것에 실려 이리저리 옮겨져 마침내 어떤 바닥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서 의식을 회복한다.
그때 바로 옆 매트리스에 누워 있던 데미안이 몸을 숙이고 오랫동안 미소를 지어며 싱클레어를 바라보다 이별을 고한다. 앞으로는 자기를 불러도 전에처럼 달려오지 못하니까, 그럴 땐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이면 자기가 싱클레어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그리고 에바부인이 당신의 키스를 대신해 주라고 했으니 눈을 감으라고 했다.
나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내 입술 위에 가벼운 입맞춤이 느껴졌다. 그러나 입술에서는 피가 멈추진 않고 계속 흘리고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잠이 들었다.(314쪽)
작품 해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근거로 데미안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싱클레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옆 매트리스에 낯선 사람이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데미안이 실존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황들은 많고, 이 장면에서만 사경을 헤매던 싱클레어의 환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친구 엄마와 키스를 한다는 망측한 상황도 단번에 날려버릴 수도 있다.
헤르만 헤세는 부모와의 불화가 깊었다. 부모는 그에게 신앙을 강요했고, 어린시절 헤세는 신학교를 뛰쳐나왔고 훗날 그의 어머니 장례식에는 참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헤르만 헤세는 신앙인이 아니라 예술가였다. 그의 청소년 시절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그의 장편소설 데뷔작 <수레바퀴 아래서>(1906)에서 신앙생활에 고통을 받던 주인공 한스를 헤세는 죽여버리는 결말을 선택했다.
하지만 <데미안>(1919)에서는 자아를 찾아 나선 싱클레어에게 베아트리체와 데미안이라는 생의 인도자를 선사하며 싱클레어가 종교나 인도자의 도움 없이도 인간으로서 홀로서기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데미안의 후일담은 어떻게 될까. 궁금하신 분들을 위하여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1922)에서 한 인간이 홀로 세상을 경험함으로써만 자기 자신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작가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소설 <데미안>은 크게 보면 문학소설이라기보다 장르 소설에 가깝다. 이 소설에는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식의 훗날 자기 계발서들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고, 분석심리학의 꿈 이야기라든지 카인의 표적, 염력으로 상대방을 부를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도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장르적 요소들보다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하여 평생 자아를 성찰해 온 작가의 내면적 기록으로 이 소설을 감상할 수 있다면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아를 성찰하는데 아주 조금은 영감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독서와 작가론은 아래 링크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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