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보인의 소설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를 읽고 압구정동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다. 소설 압구정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사기 위해 고군분투, 갭투자로 살아온 '나'의 인생 이야기이다.
칠삭둥이 한명회가 지금의 압구정동을 바라다본다면 어떤 감회에 젖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압구정은 한명회의 호이고, 그는 풍광 좋은 이곳에 정자를 지었다. 겸재 정선은 <경교명승첩>에서 언덕 위의 압구정을 신선이 사는 동네처럼 그렸다.
윤보인은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에서 압구정을 소시민이 평생 갖은 노력을 다해도 절대 닿지 못할 자본주의의 꿈같은 장소로 은유했다.
이 소설은 2023년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후보작으로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 실렸다. 수상후보작들은 모두 작품 수준이 고르고 내 취양에도 맞았다. 소설 압구정은 특히나 울림이 컸다.
2023년 제68회 현대문학상에 대하여
안보윤의 「어떤 진심」을 수상작으로 뽑은 2023년 제68회 현대문학상은 2021년 12월호~2022년 11월호(계간지 2021년 겨울호~2022년 가을호) 사이, 각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 중에서 선정했다.
수상후보작으로는 문진영 「내 할머니의 모든 것」, 박지영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이서수 「엉킨 소매」, 위수정 「몸과 빛」, 윤보인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이승은 「우린 정말 몰랐어요」, 이장욱 「요루」가 선정되었다.
윤보인 프로필
197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7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뱀'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뱀》(2011)과 장편소설 《밤의 고아》(2014), 《재령》(2020)을 썼다.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줄거리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매 맞는 것이 싫어 고아원을 탈출해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미팅에서 코카콜라 같은 여자 은주를 만났다. 담배를 꺼내 물고 압구정에 산다고 말한 은주는 하이힐보다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녔고, 흰 티를 주로 입었고, 야구 모자를 즐겨 썼으며,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고 상당히 직관적인 데다 거침이 없는 여자였다.
내가 거지 같은 자취방에서 '자살이라고 할까? 쌍.' 외로움과 싸우고 있을 때, 은주는 갑자기 찾아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자신의 고향인 진해 자은동으로 가야 한다며 차비 한 푼 없는 나를 끌고 가는 그런 여자였다. 은주는 새엄마에게 받아낸 돈으로 운동화며 옷을 사주었고, 자쥐방 월세도 몇 번 내주었다.
하지만 은주는 미국으로, 나는 대학을 그만두고 부산 덕천시장에서 양말을 팔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탑차 운전을 하며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녔고 대구 서문시장에서 또 양말을 팔았다. 얼마간의 자금을 모아 중소기업에 겨우 취직을 했다.
욕 처먹으면서 간신히 일을 배웠고 또 이를 악물고 사업체를 차렸고, 언젠가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를 꼭 사고야 말리라는 각오로 부동산 갭투자를 했다. 새벽잠을 줄이며 지방으로 임장을 다녔고, 그렇게 독하게 극빈의 극빈의 나날을 거듭한 끝에 결혼을 해서 처자식도 생겼고 끼니 걱정도 안 하고 살게 되었다.
나는 은주와 헤어진 이후 몇 명의 여자를 안으면서 앙갚음을 하려 했고, 그 와중에 감정이라는 게 오락가락해서 은주를 찾았고, 만나기 위해 은주의 아메리카로, 은주가 있는 길은 다 쫒아다기도 했다.
그렇게 은주를 오매불망했던 내 앞에, 어느날 그녀의 아들이 나타났다. 오래전 미국에서 남편과 이혼을 하고 부모도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남은 건 아들뿐인 은주가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가 악화되어 임종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다고 그녀의 아들이 병원 로비에서 내게 말했다.
며칠 뒤 은주는 눈을 감았고, 나는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거제에 가서 중곡동에 위치한 20년이 넘은 소형 아파트를 그녀의 아들 명의로 사주었고, 그가 갭투자를 터득하기를 바랐다.
책 속 윤보인의 문장
압구정 현대가 아니어서, 미안하다. 은주야. 미국으로 가버린 네가 다시 돌아와 나와 같이 압구정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가끔 했다.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퇴근 후에 돌아온 나를, 가방을 받아줄 너를 상상했다.(···)
너 차암. 안 됐어. 왜 그렇게 욕심을 내. 어쩌면 너는 저세상에서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압구정 현대에 들어가 네가 살던 동네를 추억하듯 살아보려 한다.
압구정 현대를 사지 못해서 독후감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도시에서, 혼탁한 우주에서, 아직 압구정으로 가지 못하고, 어두워지는 해안가에 남아, 바람만 부는 지독히도 아름다운 거제에서, 지금 이 글을 쓴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나'에게 압구정은 님과 함께 살고 싶은 무릉도원 같은 장소이다. 근데 주인공은 은주와 결혼조차 못했고, 더구나 그녀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게 안 되니 주인공은 압구정 현대에 들어가 네가 살던 동네를 추억하듯 살아보려 한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왜 은주와 결합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자본주의에 가로막혀 있었다.
주인공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개처럼 일했고 갭투자도 했다. 국가가 자신에게 조금만 너그럽기를, 세금 왕창 뜯어 갈 생각하지 말고, 낼 건 다 넬 테니, 제발 다주택자라고 범죄자 취급은 하지 말기를 하소연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주인공은 과연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까?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동네를 추억하며 살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압구정은 그에게 꿈이었을 뿐, 그가 추억할 수 있는 것은 압구정과 관련된 꿈뿐이어서 과연 그 꿈을 추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주인공은 갭투자로 아파트 여러 채의 명의를 가졌지만, 정작 자신은 역삼동에서 월세로 살고 있다. 그의 인생살이는 갭투자 방식을 닮았다. 압구(狎鷗)는 자연을 벗 삼아 갈매기와 친하게 논다는 뜻이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의 시집명이자 그가 만든 영화가 생각난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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